[칼럼]배요한/"기후 위기 시대의 도전과 교회의 응답을 읽고"/세계와 선교 제238호


노자의 도덕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천지불인 이안물위 추구” 천지는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는 뜻 이다. 풀이하자면 하늘과 땅, 즉 자연은 어질지 못해서 섭리대로 움직일 뿐 사람을 돌보진 않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필자가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땐, 자연의 섭리 앞에 인간은 그 무엇도 조정하려 들 수 없으며 오히려 자연의 섭리에 자기 자신을 맞추어 살아야 하기에 느껴지는 경외감과 인간을 돌보는 것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자연에 대한 냉 소를 잘 표현한다고 느꼈다. 이 경구가 말하는 것처럼 노자를 포함한 많은 지혜자와 인류는 자연 앞에서 무력감(無力感)을 느꼈다. 필자 또 한 여태껏 살아오며 노자가 느낀 그 감정을 몇 차례 느꼈다. 지진과 해 일 등 자연재해로 많은 이가 자연에 의해 목숨을 잃을 때, 나와 주변인 들에게 일어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포감과 무력감을 느꼈다. 실 로 인간은 광대한 자연의 섭리 앞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최근 들어 발생하고 있는 자연의 이상 기후들은 인류 역사상 전무(全無)한 사례로 가득하다. 인류로 인해 자연이 망가지고, 종국에는 인류와 자연 모두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필멸의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겠는가? 혼돈의 상황 속 필자는 오 늘의 상황이 “천지불인 이안물위추구”의 말이 역전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자연에게 자신의 속내를 말할 기회를 준다면 그들은 인 간에 대해 ‘인간은 어질지 못해서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고 말할 것 같은 기시감이 든 것이다. 아주 오래전, 인류가 자연의 섭리 앞에 경외감과 냉소를 느꼈던 것처럼, 자연 또한 인류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태를 보며 차디찬 냉소, 아니 어쩌면 더 나아가 자연을 멸망 시키고자 하는 살기를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단상과 함께 인류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응당한 불편함을 안고 침묵의 밤을 지나고 있을 무렵,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 책은『기후 위기 시대의 도전과 교회의 응답』1)이라는 책이다. 책의 제목 은 필자가 앞서 말한 것처럼 자연의 아픔에 귀 기울인다면 그 아픔은 교회에게 도전이 될 것이고, 교회는 그 도전에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책은 내가 마주한 고민에 대해 어느 정도 해답을 제시해주었다. 강도 만난 이를 못 본 채 지나가며 자 신을 여전히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던 어느 레위인을 나 자신이라 여기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이제야 마땅히 바라보아야 할 현 실에 시선을 두게 된 필자의 이 참회록(懺悔錄)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 하여도 하나님 보시기엔 여전히 보기 좋은 나의 형제, 나의 가족 자연 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


오늘날 자연이 겪는 아픔에 귀 기울이기 위해선, 자연이 그간 우리에게 얼마나 그들의 아픔을 말해왔는지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윤순진은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는 이상 기후 현상이 넘쳐 남을 지적하며, 2010년부터 매년 발간되는「이상 기후 보고서」엔 국내외 이상 기후이야기가 가득함을 이야기한다.2) 그리고 이상 기후 위기의 주요 원인은 화석 연료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라고 말한다.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기후 위기에 대한 염려를 들어왔기에 이산화탄소가 기 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그 규모가 이 정도일 줄 몰랐다. 그러나 이런 치명적인 안일함을 가진 채 살아온 이는 필자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말은 즉, 기후 위기는 예견된 일이었으며 대다수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조치에 나서지 않았다 는 것이다. 이제는 정말 자연의 아픔, 그 통곡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 라고 절감한다.


파국으로 치닫는 기후 위기 시대 속에서 전문가들은 지구 온도 상승을 1.5도 이내로 억제해야 하며 탄소 중립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전 세계의 이상 기후 증상에 뒤이어 윤순진은 UN의 기후 행동 정상회의의 결의 내용을 정리한다. 그에 따르면 제26차 기후 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가 열리기 전인 2021년 10월 말까지 130개가 넘는 국 가가 탄소 중립을 선언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2020년 10월 28일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에서 2021년도 예산안 시정 연설을 하면서 최초 로 탄소 중립을 선언했고 이후 여러 차례의 국내외 행사를 통해 탄소 중립 의지를 재확인하였다.3) 그러나 여기서 필자가 느낀 것은 그간 전 세계가 탄소 중립을 선언하고, 한국 또한 2021년에 이미 탄소 중립의 의지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현장 내에서는 이에 대해 전혀 논의 된 바가 없다시피 한 것이라는 점이다. 기후 위기와 탄소 중립에 대한 지적·신학적 통찰을 한 지 몰라도, 많은 지역교회는 이에 대해 말하지 도, 말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해왔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여전히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고 말하는 교회는 정작 ‘기후 위기’라는 폭풍 앞에 침묵하고 있었음에 반성한다. 청년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교회 또한 세상의 소 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지만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버린 걸까’하는 자조 섞인 비탄함이 마음을 뒤덮는다. 그러나 이미 늦었으니 소용없다 는 식의 자기혐오는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아니다. 오히려 늦었기 때 문에 하루라도 빨리 자연의 통곡에 귀 기울여야 해야만 한다. 그렇다 면, 이렇게 전 세계의 이상 기후 증상이 넘쳐나는 시대적 상황 속 교회 가 갖추어야 할 신학적 성찰과 구체적 실천 방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기후 위기에 대한 교회의 응답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오늘날의 교회에 필요한 생태 신학적 관점을 재고해보고자 한다. 본서에서는 조영호가 기후 위기를 기독교윤리의 관점에서 풀어놓았는데, 바로 이 지점이 오늘의 교회에게 필요한 생태 신학임을 다시금 느꼈다. 조영호가 지적하듯, 기후 위기 문제의 근원은 인간 활동, 즉 경제적 성장 중심의 근대 산업화 과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술을 통제하고 조작하며 인 간됨을 회복하고 자연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기후 위기라는 모습으로 나타난 인류와 생태 세계 전체에 큰 문제 를 안겨다 주었다.4) 조영호가 지적한 것처럼, 그간 교회는 피조 세계를 아프고 병들게 하는 일에 주축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말했듯 청교도의 금욕주의에 근거한 개신교인들의 소명 의식이 부의 축적을 가져왔을지는 몰라도, 이는 결과적으로 생태계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쳤다. 즉, 교회가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아프게 한 일에 주범인 것이다. 


이에 정원범은 교회가 그간 가르쳐온 인간 중심주의에 벗어나 성경 이 말하는 통전적 구원론을 회복할 때, 기후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신 학적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5) 그에 따르면 기후/생태 위 기를 극복하며 생태적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생태 목회를 위해 교회는 통전적 구원론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전통적인 신학이 “개인의 구원의 문제에 집중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지 배로부터 분리되었”고 “신학의 영역은 내면성 속에 있는 영적인 구원 의 확실성에만 몰두하게 되었”으며 “세계 전체를 구원하기 위한 지상 적·신체적·우주적 차원은 간과되었”다고 말한다.6) 그리고 그의 이러한 지적은 옳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성으로서 통전적 구원론을 재고한다면, 오늘의 교회는 생태적 책임을 다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통전적 구원론을 근간으로 한 교회의 구체적 실천 방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기후 위기에 마주한 교회가 해야 할 구체적 실천방안에 대한 내용으로는 이박행의 글이 도움이 되었다. 특히 그는 그가 산촌 생태마을과 마을 기업을 운영한 이야기를 소개해주었는데, 이 부분이 크게 와닿았 다. 그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하는 자문자답하며 예수님 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마을을 두루 다니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친 구로 사신 그를 회상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소멸해가는 농촌과 농촌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말하며, 교회와 목회자가 마을을 지키고 생명의 터전을 일굼으로써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가는 남은 자들이 되길 바라셨을 것이라고 말한다.7) 현재 기장 교회의 절반 이상 이 농촌목회를 감당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 교단은 현재 벌써 생태 목회를 위한 인프라가 이미 구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후 위기 속 교회의 해답은 미래를 바라보고 서 울과 수도권에서 메가처치를 넘어 기가처치의 허황된 꿈을 좇아 상경 (上京)한 목회자들이 아닌, 그간 담담히 흙밭을 밟아왔던 농촌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는”8) 하나님 나라의 신비가 아닐까?


서두에서 말했던 것처럼, 자연은 인간에게 문자로나, 음성으로나 말 을 건낼 수 없다. 단지 기후 위기의 현실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내고 있을 뿐이다. 자연은 당신에게 어떤 말을 건내는가? 그리고 그 말은 당 신의 내면에 어떤 도전을 일으키는가? 이제 우리는 자연의 아픔에 응 답해야 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들었던 그들의 아픔에 적실한 행동으로 대답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의 교회에게 남겨진 책무일 것이다.


일본의 문학가 엔도 슈사쿠가 쓴 『침묵』에는 이와 같은 말이 나온다. “인간은 이렇게도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 푸릅니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고난 앞에 상실과 아픔을 겪을 때, 바다가 그저 푸르게만 보이는 이 상황이 도리어 슬프게 보이는 상황을 글로 나타낸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자연이 가까운 형제, 가족처럼 느껴져서 이 기후 위기의 현실이 너무나도 가슴 아팠다. 그리고 엔도 슈사쿠의 이 말이 마 음을 맴돌았다. 기후 위기를 직면한 이때, 이제는 더 이상 자연의 아픔을 못 본 체하지 않겠노라고, 그들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응답하겠다고 다짐하며 작은 기도이자 시를 바치며 이 글을 끝맺는다.


자연은 이렇게도 아픈데, 주여, 바다가 여전히 너무 푸릅니다.

작은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는 그들의 입이 되게 하소서. 작은 손짓 하나 할 수 없는 그들의 손이 되게 하소서.

너무 슬프도록 여전히 푸르른 우리의 형제를 지키게 하소서. 부디 우리와 함께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