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이강선/"한 민족의 문자를 만들어낸 성경 번역과 문화적 중개인: 마오리족의 성서 테 파이페라 타푸(Te Paipara Tapu)와 루이파라"/목회와 인문학


"한 민족의 문자를 만들어낸 성경 번역과 문화적 중개인: 마오리족의 성서 테 파이페라 타푸(Te Paipara Tapu)와 루이파라 "

이강선 교수(기독인문학연구원 연구위원, 성균관대 번역대학원)


성경은 읽는 책이다. 즉, 기록되기 위해서는 문자가 있어야 하고, 읽기 위해서도 문자가 필요하다. 기독교를 전파하려면 다른 나라의 문자로 기 록되고 읽혀져야 한다. 성경을 각국의 현지어로 번역하려는 움직임은 오 래전부터 있어왔다. 불가타 성경이 로마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이후 영어 성경, 독일어 성경, 그리고 기타 다른 언어로 의 성경 번역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4세기 중반의 고트 (Goth)어 성경은 당시 주교인 울필라스(Ulfilas)가 문자가 없던 고트족에 게 포교하기 위해 문자를 만들기까지 했던, 헌신과 정열이 없으면 안 되는 번역 작업이었다.

울필라스는 고트족 혼혈이었고, 고트족 혼혈로 자라났다. 울필라스가 라 틴어로 된 불가타 성경을 고트어로 옮기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겠지 만, 그는 고트족 사회에서 자라났으므로 외국인보다는 문화적 어려움을 덜 겪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국화, 자국화, 축자역, 의역, 그리고 번역투와 같은 번역 용어들이 등장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느 한 단어에 정확히 상응하는 번역어가 없으므로 번역가 들은 문화 중개자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성 히에로니무스나 울필라스, 그리고 틴데일 등은 자국인이 외국어에서 자국어로 번역을 한 경우에 속한다. 이는 그들이 익숙한 환경에서 외국어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수많은 외국인이 그들의 자국어가 아닌 번역하고자 하는 언어로 번역을 하기도 했다. 외국인인 자 신이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혹은 그다지 썩 잘하지 못하는 현지어로 성경 을 번역해야 한다면 어떤 방안을 강구할까?

그런 때는 양쪽 언어에 능통한 혹은 소통이 가능한 현지인을 조력자로 삼는 것이 최상이다. 따라서 성경 번역을 할 때에는 현지인을 조력자로 둔 경우가 많았다. 1)세기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을 위해 선교를 시작한 새뮤 얼 마스덴(Samuel Marsden, 17)5-1838)도 그러했다. 마스덴은 뉴질 랜드 선교를 맡은 수장으로 성경 번역 작업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를 이 끌었던 것이다. 그의 선교에는 루아타라(Ruatara)라는 마오리족의 젊은 추장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마스덴은 영국 요크셔 출신으로 가족 배 경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20대 초반에 영국 성공회 사역을 위한 엘렌 드 성직자 협회의 지원을 받아 공부했고, 17)3년에 호주 뉴사우스웨일즈 식민지의 보조 성직자로 임명되었다. 당시 호주는 영국 죄수들이 유배되는 장소로 마스덴 역시 죄수 노동력을 활용하여 파라미터에서 농장을 운영했다. 죄수 노동력을 사용하는 만큼 강압적인 측 면이 있다. 마스덴이 어느 해 죄수에게 300대의 채찍을 치라고 명령한 기 록이 남아 있다. 당시 채찍 1,000대가 보통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마스덴 은 비교적 온건한 농장주였음이 드러난다.

응가푸히 부족의 젊은 추장이었던 루아타라는 1805년, 고래잡이 배를 타고 여행을 시작했으며 시드니에서 마스덴을 만났다. 루아타라는 4년간 선장들에게 학대를 당하거나 버림받기도 했다. 그러나 포경선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영어를 배웠고, 그의 영어 실력은 이후 큰 자산이 되었다. 그는 산타 안나호를 타고 런던에 도착했지만, 선장이 그를 무시하여 왕을 만나 지 못했다. 결국 루아타라는 죄수를 호송하는 정부 소유 선박인 안호에 탑 승하여 다시 시드니로 향했다. 180)년, 이 배에서 마스덴은 병들고 방치 되어 있던 22살의 루아타라를 발견하고 그를 간호했다.

호주에 도착한 후, 마스덴은 루아타라를 뉴사우스웨일스의 집으로 초대 했다. 8개월간 루아타라는 뉴사우스웨일스에서 유럽의 농업 기술과 목공 기술을 배우며, 자신의 고향에 돌아가서 밀 재배를 도입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마스덴의 도움을 받아 유럽의 도구와 씨앗을 가져와 농업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뉴질랜드에 는 씨앗 농사의 개념이 없었다. 마오리족은 주로 고구마, 타로, 그리고 기타 뿌리 작물을 재배하 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작물은 기후와 토양에 따라 수확량이 변동할 수 있어 안정적인 식량 공급이 어려웠다. 젊은 루아타라는 밀과 같은 새로운 작물을 도입함으로써 더 안정적이고 다양한 식량 자원을 확 보하고자 했다. 밀은 단순한 식량 자원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작물이었다. 한편, 마스덴은 루아타라로부터 뉴질랜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1814년 12월 22일, 마스덴은 루아타라 의 초청을 받아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 도 착했다. 3일 후, 크리스마스 날, 그는 뉴질랜드 최초의 교회 예배에서 300명 이 상의 마오리족에게 성경의 메시지를 소 개했다. 이 날 그는 누가복음 2장 10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 식을 전하노라”를 설교했다. 물론 이때 설교를 통역한 사람은 루아타라였다. 이 사건은 마오리와 유럽인 간의 첫 번째 공 식적인 기독교적 만남으로 기록된다.

뉴질랜드에 도착한 마스덴은 마오리족 언어로 성경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마오리족과의 관계를 통해 그들의 언어 를 배우고, 성경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스덴의 초기 작업은 마오리 족의 언어를 기록하고 문서화하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마스덴을 위해 통역을 할 당시 루아타라는 그동안의 모험과 여행으로 인해 이미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고,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마오리족은 루 아타라의 병이 선교사들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마스 덴은 격렬하게 항의했고 결국 루아타라를 방문할 수 있었다. 1815년 루아 타라는 죽었고, 그의 아내는 목을 매어 그의 뒤를 따랐다. 일곱 명의 추장 이 루타아라를 안치했다. 마스덴으로서는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루아타라의 뒤를 이었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 또 다른 부족, 흥가이 타와 케의 지도자인 홍이 히카(Hongi Hika)였다. 그는 친척인 와이카토와 더 불어 1820년 캠브리지 대학의 새뮤얼 리 교수와 협력해 로마자를 사용한 마오리 문자 체계를 만들었다. 마오리족의 언어는 테 마오 마오리(Te Reo Māori)라고 불렸다.

언어에는 문법이 있기 마련이다. 1814년 뉴질랜드 랑이호우아에 도착 한 토마스 켄달(Thomas Kendall)은 1821년 그곳을 떠날 때까지 마오리 어를 문자화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815년 켄달은 시드니에서 마오리어 로 된 첫 책을 발간했고, 1820년 말에는, 마오리어의 문법 체계에 관한 책

『뉴질랜드 언어의 문법과 어휘』 (A Grammar and Vocabulary of the Language of New Zealand)를 발간했다. 한편으로 그는 마오리족의 세계관을 조사 하기도 했다. 그러나 켄달은 가정 부와 불륜을 저지른 것이 발각되어 1823년 마스덴에 의해 해고 되었다. 켄달이 책을 펴냈던 해인 

1820년 새뮤얼 리 교수는 체계적인 마오리어 문자 체계를 만들어냈다. 이처럼 문자 체계가 갖추어지고 마오리어로 문서를 쓸 수 있게 되었지만, 마오리어 성경 번역에는 또 다른 선교사의 헌신이 필요했다.


켄달을 해고한 후인 1823년, 마스덴은 네 번째로 뉴질랜드를 향해 가다 가 배에서 헨리 윌리엄스(Henry Williams)를 만났다. 이들은 이미 만난 적이 있었고 헨리 윌리엄스는 아내와 세 자녀를 데리고 뉴질랜드로 가는 중이었다. 헨리 윌리엄스는 CMS 선교의 리더 역할을 맡았다. 그는 마오 리 문화가 문해력을 통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CMS와 웨슬리 안 선교사들이 진행하는 다양한 성경 번역 작업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 의 지도 아래, 팀은 매일 아침 파이히아에서 모여 기도하고 성경을 마오리 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1826년 7월 12일에 기록된 헨리의 일기에 헨리 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는 매일 오전 )시부터 12시까지 모여 언어 를 공부하고 보통 성경을 번역한다. 우리는 상당한 진전을 이루고 있으며, 이는 사람들과의 교류를 크게 용이하게 한다.”라고 쓰여 있어 그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1827년, 헨리 윌리엄스는 새로 도착한 아우 윌리엄과 제임스 셰퍼드와 매달 만나 마오리어 성경 번역에 집중했다. 헨리는 윌리엄의 언어적 재능 에 주목하는 한편 CMS에 전념하기 위해 번역 작업에서 물러났고, 윌리엄 윌리엄스, 제임스 셰퍼드, 윌리엄 예이트, 윌리엄 퍼키만이 모임을 계속했 다. 이 노력의 결과로 예이트는 1873년 시드니에서 550부의 117페이지 분량의 성경책을 인쇄했다. 이 책에는 창세기 1-3장, 마태복음 1-)장, 요 한복음 1-4장, 고린도전서 1-6장, 기도서 서비스, 교리문답, 그리고 1)개 의 찬송가가 포함되었다.

이들이 성경을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은 새뮤얼 리 교수와 켄달 덕분에 마오리어가 문자적 체계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오리어의 문법과 어휘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마오리족이 문해력을 가지게끔 도왔다. 한편, 자신들의 언어로 된 문서를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마오리족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러한 교육은 마오리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윌리엄스에 의하면 마오리어 성 경 사본이 동부 해안에서는 마오리어 성경이 유럽 스타일 옷보다 훨씬 더 많이 요구된다고 할 정도로 마오리어 성경은 호응도가 높았다.

문자가 없던 한 민족이 많은 사람의 헌신 덕분에 자신의 언어로 된 성경 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마오리어 성경을 통해 문화적 자긍심을 느끼게 되었고, 이는 그들의 전통과 신앙을 보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마오리어 성경은 문해력 향상과 함께 그들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 했다. 성경 번역은 복음 전파뿐 아니라 한 민족의 자긍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루아타라가 없었더라면, 홍이 히카가 없었더라면 마오리어 성경의 발간은 늦어졌을 것이다. 이들은 마오리 부족 사회에서 중요한 지도자 들로서 마스덴과 선교사들이 마오리와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었 다. 루아타라의 지지가 없었다면 선교사들은 마오리 사회에서 신뢰를 얻 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으로 루아타라는 유럽의 농업 기술을 배우고 이를 자신의 부족에 전파하는 데 열성을 기울였다. 그가 없었다면, 마오리 사회는 이러한 새로운 기술을 접할 기회를 잃었을 것이다. 루아타라가 유럽 문화를 받아들여 이를 자신의 부족에게 전파하려는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마오리어로의 성경 번역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겼던 것이다.

그의 영향력이 없었다면, 성경 번역이 지연되거나 아예 이루어지지 않았 을지도 모른다. 흔히 성경 번역에서 선교사의 역할을 강조하고 문자까지 만들어낼 정도로 헌신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만, 그 과정에서 현지인은 문화의 중재자로서 지극히 중대한 역할을 한다. 여기서 또 다시 주목할 것 은 그들의 부족 사랑이 지극했다는 점이다. 마오리족의 경우, 루아타라와 홍 카이, 두 협력자는 부족의 번영을 원했고 문명화를 바랐다. 이들의 협력이 결과적으로는 마오리족의 성경을 만들었고, 오늘날의 마오리 성경, 테 파이페라 타푸(Te Paipera Tapu)가 있는 것이다.

2025. 05. 01.


출처: 교회설장연구소(portal.icg21.com/board/board.php?bbs_id=humanities&ptype=view&kbbs_doc_num=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