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주원규/'욕망의 조건에 대하여'/주간기독교


김희원 연출 《작은 아씨들》


 2022년 9월, tvN을 통해 방영된 12부작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매우 독특한 서사를 가진 드라마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가난하지만 서로의 돈독한 우애를 잊지 않으며 성장한 세 자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독특한 여성 서사의 탄생을 기대하게 한다. 반대로 이 세 자매가 대한민국에 가장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에 맞서서 충돌한다는 서사는 한국 드라마가 전형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계급 파괴 판타지를 다룬다는 점에서 식상한 느낌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한 가지 점이 이 드라마를 주목하게 한다. 욕망의 조건을 탐색한다는 점이 그렇다.

세 자매가 놓인 억압적인 현실에서 이들은 각자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 세 자매가 가진 모순을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첫째 오인주(김고은 역), 그녀는 가족을 가난에서 구원하려는 굳은 결심을 가진 첫째 딸이다. 가난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그녀는 어떠한 희생도 불사하겠다는 결의가 확실히 보이는 인물이다. 그녀의 행동이 드라마 속 여러 사건의 충돌을 겪으며 위법하고,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 또한 어쩔 수 없었을 거라 공감하게 되는 도덕적 딜레마를 시청자들에게 선사한다.

둘째 오인경(남지현 역)은 기자다. 진실을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는 그녀는 진실만 추구하고자 하지만 현실을 그녀에게 진실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가난하게 자란 자신의 과거 배경과 극단적 대비를 이루는 부유하고 교양 넘치는 세계 사이에서 그녀의 정체성은 악화일로의 상황 앞에 놓이게 된다. 여기에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인해 자신의 꿈과 욕망 사이에서 방황한다. 물론 그 갈등의 도가니에서 자신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어릴 적 친구의 도움으로 끝까지 진실을 위해 싸우려는 방향성을 가진 인물로 서사의 중심에 서게 되지만, 진실의 추구와 현실의 냉혹함 사이에서의 방황과 갈등은 첫째 오인주의 가난에서의 구원 서사가 가진 강렬함과 또 다른 모순을 잉태한다.

마지막으로 막내 오인혜(박지후 역), 그녀는 뛰어난 미술 재능을 지녔고, 누가 봐도 순수한 영혼으로 비추는 인물이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인하여 자신의 재능을 맘껏 펼치지 못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재능을 돈과 바꾸는 비겁한 선택을 하게 된다. 언니들이 자신 때문에 더는 힘들어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자신이 언니들의 짐이되고 싶지 않아, 선택하게 되는 모습에서 그녀는 재능과 돈을 맞바꾸는 파우스트와 같은 거래를 하고 만 것이다.

 드라마는 시작부터 팽팽한 긴장감으로 전개된다. 인주네 세 자매의 가난을 상장하는 흙수저의 삶, 그에 반해 장군의 딸에 미스코리아 출신의 미술관, 장학재단을 운영하는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원상아(엄지원 역)와 같은 금수저의 삶의 대비가 극적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여기에 회사의 불법 비자금 700억을 세탁해 단 하루 만이라도 금수저의 삶을 경험해보고 싶은 인주의 직장 동료 화영(추자현 역)과 같은 이들이 욕망의 불꽃에 휘말리게 만든다.

이 욕망의 불꽃이 드라마 안에서 세 자매를 옴짝달싹할 수 없는 엄청난 밀도의 모순의 세계로 안내한다. 과거 보배저축은행 사건의 배후라 의심되지만, 겉으로는 청년들의 든든한 부자 아버지가 되어주겠다며 박재상 재단을 설립한, 뼛속같이 금수저인 원상의 남편 박재상(엄기준 역), 동시에 박재상 같은 부류의 인종, 곧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정치인들에게 비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5년간이나 화영과 공생하며, 불법 비자금을 운용해온 신현민(오정세 역) 이사와 같은 악어와 악어새 같은 부자연스럽고 비도덕적인 굴레의 세 자매가 각각의 이유로 얽혀버린 풍경을 드라마는 긴박한 리듬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 정리해 보면 인주, 인경, 인혜, 이 세 자매는 저마다의 처절한 사연이 스며든 사건의 굴레 속에서 필연적으로 살길을 찾기 위한 자기만의 결의를 구체화해야만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고 만다. 그리고, 이 처절한 이유의 근원에는 돈이 있다.

세 자매가 이후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더 궁극적으로 중요한 지점은 이들 세 자매가 처음부터 욕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느냐는 것이다. 허무하리만치 이 질문에 관한 답은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이다. 세 자매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의 삶의 가장 근본을 이루는 필수 조건으로 욕망을 선택하지 않는다. 욕망보다 더 근본적인 건 그 욕망으로 인간을 내모는 조건이다. 인간은 왜 욕망의 한복판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으며,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가. 그리고, 또 하나. 그 발버둥 이후의 세상은 우리에게 어떤 지평으로 다가오는가.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아쉽게도 그 욕망의 배후를 지배하는 조건과 그 이후의 지평에 관해 어떤 명쾌한 답도 주지 않는다. 단지 주어진 욕망의 모순 앞에서 치열하게 부딪히는 세 자매의 단내 나는 분투기를 그릴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드라마가 선사하는 성취는 분명하다. 욕망의 조건을 생각할 수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만하기 때문이다.

출처 : 주간기독교(http://www.cnews.or.kr/articleView.html?idxno=2887) 
 

2024. 06.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