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택 교수(장신대 구약학)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른 말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단연코 ‘믿음’이라고 말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의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의인 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는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기독 교 신앙을 특⑨짓는 말씀으로 여러 차례 인용된다(❹ 1:17; 갈 3:11; 히 10:38). 또한 이 말씀은 타락하고 변질된 중세 가톨릭교회에 철퇴를 가하 고 개신교 신앙의 기틀을 제공한 종교개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러나 반대로 이 ‘믿음’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에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 기도 하고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만큼 중요하면서도 올바 른 이해가 필요한 것이 ‘믿음’이다. 이 글에서는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제공하는 하박국 본문을 고찰함으로 우리에게 요청 되는 ‘의인의 믿음’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1)
하박국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은 1-2장의 내용으 로 예언자가 씨름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질문과 그것에 대한 야훼의 답변 을 포함하고 있고, 두 번째 부분은 3장의 내용으로서 찬양시 형식의 기도 이다. 하박국서의 구조를 간략하게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위의 구조를 보면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라는 진술이 등장하는 2장 은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하박국은 율법이 마 비되고 공의가 드러나지 않는 시대를 목격하며 “하나님은 이러한 때에 왜 잠잠하시는가?” 하고 탄식한다(합 1:2-4; 또한 참조, 렘 5:26-29, 7:1-15, 22:13-19). 이때 야훼께서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 며 자기 소유 아닌 거할 곳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다고 말씀하 신다(6-11절). 이러한 하나님의 응답에 하박국의 질문이 다시 제기된다. 그것은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행동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왜 당 신은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한 자들이 자기보다 의로운 자를 삼킬 때에도 잠잠하시나이까?”(13절) 심판의 주체가 된 갈대아 사람들은 유다 의 심판자로 행동하지만 마치 그물로 물고기를 잡듯이 유다인들을 잡아가며 열국을 삼키는 자들이다. 이러한 정황은 “치료가 질병보다 더 나쁘다.”
(The cure is worse than the disease.)라는 논리적 비판이 가능하게 한 다.2)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하는 하박국의 질문은 신정론에 대한 질문이기 도 하다(예컨대, 아브라함의 질문 - 창 18:25, 모세의 질문 - 출 5:22-23; 그 외 예레미야나 욥의 수많은 탄식들).
이때 첫 번째 부분의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는 하박국 2장은 하박국 1장 과 서술 양식에서 ❹렷한 차이를 보인다.3) 하박국 1장에는 하박국이나 야 훼의 말씀이 직접 인용되어 있으나 2장에서는 하박국이 자신의 말로 보도 하고 있는 양식을 취한다. 야훼의 응답도 야훼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박국이 야훼의 응답을 받아 전달하는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야훼가 3인칭으로 묘사되고 있고, 하박국이 독자나 자기 자신의 청중에게 말하고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 하박국의 논평이 함께 나타난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라는 진술이 등장하는 하박국 2장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하박국은 자신의 백성이 무자비한 민족에 의해서 약탈당하도록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끝까지 자신 의 의문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응 답을 기다린다(1절). 그의 혼란과 의문 을 해소시킬 응답을 주실 분은 오직 하 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박국은 자신을 곧 도착할 하나님의 메시지(전령)를 기다리는 초병에 비유한다. 그러나 여 기서 하박국의 모습은 일반적인 초병과는 다르다. 그가 지켜보며 기다리 는 것은 적들의 침입이나 다가오는 위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응답이다. 자 신의 ‘항변( )’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다(특별히 1:12-17의 질문).
하박국은 자신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한다. 하박국은 “야훼 께서 대응하여 말씀하셨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응답이 다. 이것은 “야훼의 말씀이 나에게 임하였다”라는 일반적인 표현과 확연히 다르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응답은 ‘묵시( )’의 형태로 주어진다. 하 박국은 그 묵시를 ‘판( )’에 기록해야 한다. 신탁을 기록하고 그것을 해 석하는 것은 예언자의 일반적인 활동이다. 예언서에서 신탁의 기록은 여 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이사야는 ‘서판’과 ‘책’에 쓰도록 지시 받았고(사 8:1, 30:8), 예레미야는 ‘책’에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는다(렘 30:2). 하박 국의 경우는 ‘판들( )’에 기록하라고 한다. 이것은 ‘기록하다( )’라 는 동사와 함께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의 두 돌판을 떠올리게 한 다(출 24:12, 31:18, 32:15, 34:1, 28; 신 9:9-11, 10:2, 4; 대하 5:10).
‘묵시’는 읽는 사람이 알아보기 쉽도록 명백하게 기록되어야 했다(동사 의 용례: 신 1:5, 27:8). 2절 후반절은 묵시의 기록 목적을 설명하 고 있다. 그것은 ‘읽는 자가 달려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많은 경우 히브리 본문과 어순을 다르게 하며 의미가 통하도록 한다고 하여(ad sensum) 우리말 성경에서도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이라고 번역 되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은 분명하다. 읽는 자가 달려가도록 기록하 라는 것이다. 이것은 묵시의 내용이 분명하게 기록됨으로 읽는 자는 달려 가 전하지 않으면 안 될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하박국이 받은 ‘묵시’는 ‘종말’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즉각적이기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정한 때( )’가 있다.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하기까지는 이집트를 패 퇴시킨 지 대략 66년의 시간이 걸렸다(주전 605년에서 주전 539년까지). 묵시는 미래적이다. 그러나 지체되지 않는다.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더디더라도 기다려야 한다.
4-5절은 하박국이 받은 묵시의 개요이다. 그것의 완전한 형태는 6-20절 의 내용이라고 여겨진다. 여기에서는 예언자에게 보여주신 묵시의 핵심이 요약적으로 서술된다. 그것은 3가지 주요 내용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교만한 자는 그의 마음이 올바르지 않다(4절 전반절)는 것이고, 둘째,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4절 후반절)는 것이며, 셋째, 그러나 교만한 자는 여전 히 그칠 줄 모르는 욕망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5절)는 내용이다. 그렇 다면 흔히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의 근거로 인용되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라는 진술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4절에서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대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4절 전반절에서 ‘교만한 자’로 번역된 히브리 낱말 () 는 ‘마음이 부풀어 올라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민 14:44; 참조, 신 1:43). 이러한 사람의 특⑨은 삶의 기준이 자기 자신 안에 있다. 그러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자기만 족에 빠져 있고 자기 자신을 믿으며, 따라서 하나님께는 냉담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욕망과 욕심에 이끌려 살아가기 때문에, 그의 마음이 올바르 지 않다. 이러한 교만한 자에 대한 심판 예언이 이사야서에 많이 나타난다 (사 2:11-12, 17, 13:11, 28:1, 3).
5절은 다시 교만한 자의 모습을 묘사한다. <베아프 키>()라는 연결 어구가 교만한 자의 모습을 주목하게 한다. 교만한 자는 속이는 힘을 가진 포도주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처지를 볼 수 없으며 그의 눈은 한껏 부풀어 올라 있다.4) 그의 욕망은 멈출 줄 모른다. 스올과 죽음과 같이 끝 없이 집어 삼키고 만족하지 않는다. 세계 모든 열방과 민족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자 한다. 이것은 죽음처럼 계속해서 다른 나라들을 집어 삼키고 자신의 그물 속으로 휩쓸어 넣고 있는 제국 바벨론의 모습을 상징한다(1:13, 15).5) 5절에서 ‘스올’과 ‘죽음’은 교만한 자의 종말에 대한 은유로서 나타난다. 멈출 줄 모르고 끝없이 부풀어 오르고 한없이 집어 삼키는 교만한 자의 끝은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4절 후반절의 ‘의인’이다. 그렇다면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 )는 말은 어떤 의미가 있 는가? 이것은 두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는 의인의 삶의 방식을 말 하는 진술로 이해하는 것이다. 교만한 자나 악인과는 달리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따른다면 이 본문은 ‘이신칭의’ 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본문으로 인용하기에 적절치 않게 여겨진다. 하지 만 이 진술에 대한 다른 이해가 가능하다. 그것은 이 말을 의인이 누구인가를 말하고 있는 진술로 이해하는 것이 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사는 자’라 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믿음으로 사는 모습’을 보면 그가 ‘의인’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이신 칭의’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하박국서를 인용하는 방식이다.
이 두 가지 이해의 방식 가운데 중요한 문제가 ‘믿음’이란 무엇인가이다. ‘믿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낱말 <에무나>()는 ‘견고하다’, ‘신빙성 이 있다’는 기본 의미를 가진 <아만>( )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6) 이 낱 말은 ‘견고함’, ‘확고부동함’, ‘진실’, ‘신실’, ‘충성’, ‘신뢰’, ‘성실’ 등의 다 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낱말은 히브리 성경에서 49회 사용되었는 데, 이 가운데 사람의 성품에 대해서는 20회 사용되었다. 70인경은 이 낱말을 17회는 로, 2회는 로 옮겼다. 이 낱말은 ()의 대응어로서 자주 사용된다. 이 낱말이 하나님에 관하여 사용될 때는 약 속하신 바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나 하나님 말씀의 확실성을 표 현한다. 따라서 이 낱말은 하나님의 자비(시 89:25, 92:3, 98:3; 호 2:22),
하나님의 의(삼상 26:23; 시 56:13, 143:1; 사 11;5), 또는 하나님의 구원 (시 40:11)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믿음’은 의인이 가지고 있는 ‘신뢰’와 ‘성실성’, ‘신실함’을 의미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의인이 보여주는 신실함은 인격적인 충성과 하나님 의 말씀에 대한 신뢰 모두를 포함한다.7)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 뢰를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이 행동으로 보이실 때까지 인내함으로 기다린다. 따라서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의 삶의 근거 는 자신에게 있지 않다. 삶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 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성실하심을 의지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 며 사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다. 그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통 해 자신의 삶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생명의 원천이며(시 36:9; 렘 2:13, 17:13), 그분의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이다(신 4:1, 30:20,
32:47). 이러한 믿음의 삶은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1:12)는 하박국의 진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라는 진술은 다른 차원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그것은 ‘그의 믿음()’에서 믿음의 주체가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의인이 생명을 얻는 삶을 사는 것은 ‘그 분의 믿음’, 곧 ‘하나님의 신실함’ 때문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이해를 보여주는 것이 구약의 헬라어 번역성경인 70인경(LXX)의 이해이다.
70인경에서는 이 본문이 “의인은 ‘나의 믿음/신실함’( )으로 산다.”로 번역되어 있다. 의인은 ‘나의 믿음’, 즉 하나님 자신의 신실함으로 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의인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자신의 보호와 인도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통해 산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이처럼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는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 다.8) 그렇다면 이 본문이 신약성경에서는 어떻게 인용되고 있을까? 세 군 데(❹ 1:17; 갈 3:11; 히 10:38)에 인용되어 있는 본문들을 간략하게 살 펴보자. 먼저, 로마서 1장 17절은 16절과 연속선상에 있다. 16절에서 바 울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 한다. 이어서 17절에서는 복음 안에서 믿는 자가 경험하는 구원을 더 구 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이 다. 그런데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은 철저하게 ‘믿음’ 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바울이 이 ‘하나님의 의’ 를 ‘칭의(justification)’를 포함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참 조, ❹ 3:21-26). 복음에 나타난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믿 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 ()’을 얻는 자가 되는 것이다(❹ 3:22, 24). 여기에서 간과하 지 말아야 할 것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바울이 믿는 자가 경험하는 구원 의 내용은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의를 경험하는 방식은 동일하다는 것이 다. 그것은 오직 ‘믿음’이다. 죄인된 인간이 의롭게 되어 죄의 종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하 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길은 철두철미 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 해서만 가능하듯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를 힘쓰며 의인의 삶을 살 고자 하는 자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사는 길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하박국서에서 와 마찬가지로 로마서에서 이 믿음은 일회적인 행동이나 지적인 행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믿는 자가 보여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신실한 삶 이다. 그래서 바울은 순종을 강조한다. 믿음의 결과는 순종으로 나타난다 (, ❹ 1:5, 1(:25-27).
갈라디아서에서도 로마서에서와 같이 칭의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박국 서를 인용한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 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갈 3:11).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짐 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율법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 사가 될 수 있어도 의롭게 할 수는 없다(갈 3:24).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 해서 가능하다. 그렇지만 갈라디아서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 하나님 자녀 의 삶이 어떠해야 되는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믿음의 사람들은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갈 5:1). 자 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 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해야 한다(갈 5:13).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성령 의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갈 5:1(-24). 갈라디아서도 로마서와 같이 ‘믿음’의 삶은 의롭게 되고 구원 얻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자유를 가지고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세 번째 인용이 들어있는 히브리서 10장 38절 말씀은 하박국서에 나타 난 믿음의 모습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본문이다. 하박국서에 나타난 의 인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확고부동하게 갈망하는 자들에게 적용되 었다(참조, 히 10:37). 약속하신 말씀에 굳게 서서 신실함으로 인내하면 지체하지 않으시고 오실 이가 오실 것이며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다. 여 기에는 묵시의 이루어짐이 지체되지 않고 속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하박국 2장 3절과의 관련성도 엿보인다. 뒤로 물러가지 않고 믿음의 신실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구원이 약속된다(히 10:39). 이어지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는 옛 언약 안에서 믿음의 삶을 산 신앙의 선진들의 삶이 소개된다. 그리 고 히브리서 12장에서는 다시금 믿음의 삶이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며 그분이 보 여주신 삶처럼 낙심치 않고 인내함으로 신앙의 경주를 승리로 이끄는 것 이다(히 12:1-3).
하박국 2장 4절후반절은 의인의 삶을 요약한다. 탈무드도 이 한 문장이 모든 율법을 요약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모세는 (13개의 계명을 받았다. 그러나 다윗을 그것을 11개로 줄였고(시 15편), 이사야는 그것을 (개로 줄였으며(사 33:15-1(), 미가는 그것들을 3개로 줄였고(미 (:8), 이사야는 그것들을 두 개로 줄였으며(사 5(:1), 아모스와 하박국은 그것들을 단 하 나의 계명으로 줄였다(암 5:4; 합 2:4).”9)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요약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계명이라 말할 수 있다. 의인은 자신의 ‘믿음’과 하나님의 ‘신실 함’으로 살게 된다. 여기에서 믿음은 두 가지 차원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 한 ‘신뢰’와 ‘신실함’,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함’과 ‘성실함’. 의인은 이 두 차원의 믿음을 통해 산다.
출처: 교회성장연구소(2024년 6월 호 목회와 인문학 하박국서에 나타난 의인의 믿음)
하경택 교수(장신대 구약학)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른 말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단연코 ‘믿음’이라고 말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의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의인 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는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은 신약성경에서 기독 교 신앙을 특⑨짓는 말씀으로 여러 차례 인용된다(❹ 1:17; 갈 3:11; 히 10:38). 또한 이 말씀은 타락하고 변질된 중세 가톨릭교회에 철퇴를 가하 고 개신교 신앙의 기틀을 제공한 종교개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러나 반대로 이 ‘믿음’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에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 기도 하고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만큼 중요하면서도 올바 른 이해가 필요한 것이 ‘믿음’이다. 이 글에서는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제공하는 하박국 본문을 고찰함으로 우리에게 요청 되는 ‘의인의 믿음’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1)
하박국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은 1-2장의 내용으 로 예언자가 씨름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질문과 그것에 대한 야훼의 답변 을 포함하고 있고, 두 번째 부분은 3장의 내용으로서 찬양시 형식의 기도 이다. 하박국서의 구조를 간략하게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위의 구조를 보면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라는 진술이 등장하는 2장 은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하박국은 율법이 마 비되고 공의가 드러나지 않는 시대를 목격하며 “하나님은 이러한 때에 왜 잠잠하시는가?” 하고 탄식한다(합 1:2-4; 또한 참조, 렘 5:26-29, 7:1-15, 22:13-19). 이때 야훼께서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 며 자기 소유 아닌 거할 곳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다고 말씀하 신다(6-11절). 이러한 하나님의 응답에 하박국의 질문이 다시 제기된다. 그것은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행동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왜 당 신은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한 자들이 자기보다 의로운 자를 삼킬 때에도 잠잠하시나이까?”(13절) 심판의 주체가 된 갈대아 사람들은 유다 의 심판자로 행동하지만 마치 그물로 물고기를 잡듯이 유다인들을 잡아가며 열국을 삼키는 자들이다. 이러한 정황은 “치료가 질병보다 더 나쁘다.”
(The cure is worse than the disease.)라는 논리적 비판이 가능하게 한 다.2)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하는 하박국의 질문은 신정론에 대한 질문이기 도 하다(예컨대, 아브라함의 질문 - 창 18:25, 모세의 질문 - 출 5:22-23; 그 외 예레미야나 욥의 수많은 탄식들).
이때 첫 번째 부분의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는 하박국 2장은 하박국 1장 과 서술 양식에서 ❹렷한 차이를 보인다.3) 하박국 1장에는 하박국이나 야 훼의 말씀이 직접 인용되어 있으나 2장에서는 하박국이 자신의 말로 보도 하고 있는 양식을 취한다. 야훼의 응답도 야훼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박국이 야훼의 응답을 받아 전달하는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야훼가 3인칭으로 묘사되고 있고, 하박국이 독자나 자기 자신의 청중에게 말하고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 하박국의 논평이 함께 나타난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라는 진술이 등장하는 하박국 2장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하박국은 자신의 백성이 무자비한 민족에 의해서 약탈당하도록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끝까지 자신 의 의문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응 답을 기다린다(1절). 그의 혼란과 의문 을 해소시킬 응답을 주실 분은 오직 하 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박국은 자신을 곧 도착할 하나님의 메시지(전령)를 기다리는 초병에 비유한다. 그러나 여 기서 하박국의 모습은 일반적인 초병과는 다르다. 그가 지켜보며 기다리 는 것은 적들의 침입이나 다가오는 위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응답이다. 자 신의 ‘항변( )’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다(특별히 1:12-17의 질문).
하박국은 자신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한다. 하박국은 “야훼 께서 대응하여 말씀하셨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응답이 다. 이것은 “야훼의 말씀이 나에게 임하였다”라는 일반적인 표현과 확연히 다르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응답은 ‘묵시( )’의 형태로 주어진다. 하 박국은 그 묵시를 ‘판( )’에 기록해야 한다. 신탁을 기록하고 그것을 해 석하는 것은 예언자의 일반적인 활동이다. 예언서에서 신탁의 기록은 여 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이사야는 ‘서판’과 ‘책’에 쓰도록 지시 받았고(사 8:1, 30:8), 예레미야는 ‘책’에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는다(렘 30:2). 하박 국의 경우는 ‘판들( )’에 기록하라고 한다. 이것은 ‘기록하다( )’라 는 동사와 함께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의 두 돌판을 떠올리게 한 다(출 24:12, 31:18, 32:15, 34:1, 28; 신 9:9-11, 10:2, 4; 대하 5:10).
‘묵시’는 읽는 사람이 알아보기 쉽도록 명백하게 기록되어야 했다(동사 의 용례: 신 1:5, 27:8). 2절 후반절은 묵시의 기록 목적을 설명하 고 있다. 그것은 ‘읽는 자가 달려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많은 경우 히브리 본문과 어순을 다르게 하며 의미가 통하도록 한다고 하여(ad sensum) 우리말 성경에서도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이라고 번역 되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은 분명하다. 읽는 자가 달려가도록 기록하 라는 것이다. 이것은 묵시의 내용이 분명하게 기록됨으로 읽는 자는 달려 가 전하지 않으면 안 될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하박국이 받은 ‘묵시’는 ‘종말’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즉각적이기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정한 때( )’가 있다.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하기까지는 이집트를 패 퇴시킨 지 대략 66년의 시간이 걸렸다(주전 605년에서 주전 539년까지). 묵시는 미래적이다. 그러나 지체되지 않는다.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더디더라도 기다려야 한다.
4-5절은 하박국이 받은 묵시의 개요이다. 그것의 완전한 형태는 6-20절 의 내용이라고 여겨진다. 여기에서는 예언자에게 보여주신 묵시의 핵심이 요약적으로 서술된다. 그것은 3가지 주요 내용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교만한 자는 그의 마음이 올바르지 않다(4절 전반절)는 것이고, 둘째,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4절 후반절)는 것이며, 셋째, 그러나 교만한 자는 여전 히 그칠 줄 모르는 욕망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5절)는 내용이다. 그렇 다면 흔히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의 근거로 인용되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라는 진술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4절에서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대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4절 전반절에서 ‘교만한 자’로 번역된 히브리 낱말 () 는 ‘마음이 부풀어 올라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민 14:44; 참조, 신 1:43). 이러한 사람의 특⑨은 삶의 기준이 자기 자신 안에 있다. 그러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자기만 족에 빠져 있고 자기 자신을 믿으며, 따라서 하나님께는 냉담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욕망과 욕심에 이끌려 살아가기 때문에, 그의 마음이 올바르 지 않다. 이러한 교만한 자에 대한 심판 예언이 이사야서에 많이 나타난다 (사 2:11-12, 17, 13:11, 28:1, 3).
5절은 다시 교만한 자의 모습을 묘사한다. <베아프 키>()라는 연결 어구가 교만한 자의 모습을 주목하게 한다. 교만한 자는 속이는 힘을 가진 포도주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처지를 볼 수 없으며 그의 눈은 한껏 부풀어 올라 있다.4) 그의 욕망은 멈출 줄 모른다. 스올과 죽음과 같이 끝 없이 집어 삼키고 만족하지 않는다. 세계 모든 열방과 민족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자 한다. 이것은 죽음처럼 계속해서 다른 나라들을 집어 삼키고 자신의 그물 속으로 휩쓸어 넣고 있는 제국 바벨론의 모습을 상징한다(1:13, 15).5) 5절에서 ‘스올’과 ‘죽음’은 교만한 자의 종말에 대한 은유로서 나타난다. 멈출 줄 모르고 끝없이 부풀어 오르고 한없이 집어 삼키는 교만한 자의 끝은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4절 후반절의 ‘의인’이다. 그렇다면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 )는 말은 어떤 의미가 있 는가? 이것은 두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는 의인의 삶의 방식을 말 하는 진술로 이해하는 것이다. 교만한 자나 악인과는 달리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따른다면 이 본문은 ‘이신칭의’ 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본문으로 인용하기에 적절치 않게 여겨진다. 하지 만 이 진술에 대한 다른 이해가 가능하다. 그것은 이 말을 의인이 누구인가를 말하고 있는 진술로 이해하는 것이 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사는 자’라 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믿음으로 사는 모습’을 보면 그가 ‘의인’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이신 칭의’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하박국서를 인용하는 방식이다.
이 두 가지 이해의 방식 가운데 중요한 문제가 ‘믿음’이란 무엇인가이다. ‘믿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낱말 <에무나>()는 ‘견고하다’, ‘신빙성 이 있다’는 기본 의미를 가진 <아만>( )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6) 이 낱 말은 ‘견고함’, ‘확고부동함’, ‘진실’, ‘신실’, ‘충성’, ‘신뢰’, ‘성실’ 등의 다 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낱말은 히브리 성경에서 49회 사용되었는 데, 이 가운데 사람의 성품에 대해서는 20회 사용되었다. 70인경은 이 낱말을 17회는 로, 2회는 로 옮겼다. 이 낱말은 ()의 대응어로서 자주 사용된다. 이 낱말이 하나님에 관하여 사용될 때는 약 속하신 바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나 하나님 말씀의 확실성을 표 현한다. 따라서 이 낱말은 하나님의 자비(시 89:25, 92:3, 98:3; 호 2:22),
하나님의 의(삼상 26:23; 시 56:13, 143:1; 사 11;5), 또는 하나님의 구원 (시 40:11)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믿음’은 의인이 가지고 있는 ‘신뢰’와 ‘성실성’, ‘신실함’을 의미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의인이 보여주는 신실함은 인격적인 충성과 하나님 의 말씀에 대한 신뢰 모두를 포함한다.7)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 뢰를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이 행동으로 보이실 때까지 인내함으로 기다린다. 따라서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의 삶의 근거 는 자신에게 있지 않다. 삶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 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성실하심을 의지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 며 사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다. 그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통 해 자신의 삶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그분이야말로 생명의 원천이며(시 36:9; 렘 2:13, 17:13), 그분의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이다(신 4:1, 30:20,
32:47). 이러한 믿음의 삶은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1:12)는 하박국의 진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라는 진술은 다른 차원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그것은 ‘그의 믿음()’에서 믿음의 주체가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의인이 생명을 얻는 삶을 사는 것은 ‘그 분의 믿음’, 곧 ‘하나님의 신실함’ 때문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이해를 보여주는 것이 구약의 헬라어 번역성경인 70인경(LXX)의 이해이다.
70인경에서는 이 본문이 “의인은 ‘나의 믿음/신실함’( )으로 산다.”로 번역되어 있다. 의인은 ‘나의 믿음’, 즉 하나님 자신의 신실함으로 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의인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자신의 보호와 인도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통해 산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이처럼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는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 다.8) 그렇다면 이 본문이 신약성경에서는 어떻게 인용되고 있을까? 세 군 데(❹ 1:17; 갈 3:11; 히 10:38)에 인용되어 있는 본문들을 간략하게 살 펴보자. 먼저, 로마서 1장 17절은 16절과 연속선상에 있다. 16절에서 바 울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 한다. 이어서 17절에서는 복음 안에서 믿는 자가 경험하는 구원을 더 구 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이 다. 그런데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은 철저하게 ‘믿음’ 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바울이 이 ‘하나님의 의’ 를 ‘칭의(justification)’를 포함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참 조, ❹ 3:21-26). 복음에 나타난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믿 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 ()’을 얻는 자가 되는 것이다(❹ 3:22, 24). 여기에서 간과하 지 말아야 할 것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바울이 믿는 자가 경험하는 구원 의 내용은 다를지라도 하나님의 의를 경험하는 방식은 동일하다는 것이 다. 그것은 오직 ‘믿음’이다. 죄인된 인간이 의롭게 되어 죄의 종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하 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길은 철두철미 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 해서만 가능하듯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를 힘쓰며 의인의 삶을 살 고자 하는 자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사는 길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하박국서에서 와 마찬가지로 로마서에서 이 믿음은 일회적인 행동이나 지적인 행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믿는 자가 보여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신실한 삶 이다. 그래서 바울은 순종을 강조한다. 믿음의 결과는 순종으로 나타난다 (, ❹ 1:5, 1(:25-27).
갈라디아서에서도 로마서에서와 같이 칭의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박국 서를 인용한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 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갈 3:11).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짐 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율법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 사가 될 수 있어도 의롭게 할 수는 없다(갈 3:24).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 해서 가능하다. 그렇지만 갈라디아서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 하나님 자녀 의 삶이 어떠해야 되는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믿음의 사람들은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갈 5:1). 자 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 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해야 한다(갈 5:13).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성령 의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갈 5:1(-24). 갈라디아서도 로마서와 같이 ‘믿음’의 삶은 의롭게 되고 구원 얻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자유를 가지고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세 번째 인용이 들어있는 히브리서 10장 38절 말씀은 하박국서에 나타 난 믿음의 모습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본문이다. 하박국서에 나타난 의 인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확고부동하게 갈망하는 자들에게 적용되 었다(참조, 히 10:37). 약속하신 말씀에 굳게 서서 신실함으로 인내하면 지체하지 않으시고 오실 이가 오실 것이며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다. 여 기에는 묵시의 이루어짐이 지체되지 않고 속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하박국 2장 3절과의 관련성도 엿보인다. 뒤로 물러가지 않고 믿음의 신실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구원이 약속된다(히 10:39). 이어지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는 옛 언약 안에서 믿음의 삶을 산 신앙의 선진들의 삶이 소개된다. 그리 고 히브리서 12장에서는 다시금 믿음의 삶이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며 그분이 보 여주신 삶처럼 낙심치 않고 인내함으로 신앙의 경주를 승리로 이끄는 것 이다(히 12:1-3).
하박국 2장 4절후반절은 의인의 삶을 요약한다. 탈무드도 이 한 문장이 모든 율법을 요약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모세는 (13개의 계명을 받았다. 그러나 다윗을 그것을 11개로 줄였고(시 15편), 이사야는 그것을 (개로 줄였으며(사 33:15-1(), 미가는 그것들을 3개로 줄였고(미 (:8), 이사야는 그것들을 두 개로 줄였으며(사 5(:1), 아모스와 하박국은 그것들을 단 하 나의 계명으로 줄였다(암 5:4; 합 2:4).”9)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요약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계명이라 말할 수 있다. 의인은 자신의 ‘믿음’과 하나님의 ‘신실 함’으로 살게 된다. 여기에서 믿음은 두 가지 차원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 한 ‘신뢰’와 ‘신실함’,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함’과 ‘성실함’. 의인은 이 두 차원의 믿음을 통해 산다.
출처: 교회성장연구소(2024년 6월 호 목회와 인문학 하박국서에 나타난 의인의 믿음)